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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 이야기

''고산 윤선도의 茶詩 考''

by 산능선 2005. 2. 1.


고산윤선도가어부사시사를만들었던곳이다.고산윤선도는세상을떠나은둔하고자

제주도로가던중보길도의풍광에

반해그곳에머물게되었다고한다.

윤선도는보길도부용동에인공호수와정자를지어놓고시와술로세월로보냈다고하는데,

그곳이바로세연정이다.

개울에보를막아논에물을대는원리를이용해만든인공연못인세연지는

우리나라조경문화의아름다움을한눈에보여주는걸작.

이곳에서앞산으로10여분을올라가면옥소대라는바위가나오는데

윤선도는이곳에무희들을올려놓고춤을추게하고세연정에비치는그그림자를즐겼다한다


<<고산 윤선도의 茶詩 考>>


-김기원(진주산업대학교)의 연구논문 중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고산 윤선도의 茶詩 考" 본론중..



*고산 윤선도의 茶詩

지금까지 고산 윤선도의 문학적 배경과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본 결과 고산은
조선조의 지식인으로 격조높은 선비이며 시조문학의 대가인 반면에 歸自然意識에
젖어들어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고 자연친화작품에 정력을 기울이게 된 종합적
영향력은 역시 자연사상의 배경이라 할 수 있겠다. 고산의 문학사상에 잠재 되었던
제반 사상적 배경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믿어지는 요인은 시대적 배경과
오랜 차생활을 통하여 고산 문학 속에 깊이 배양되었던 체험과 현실을 이해하고
그대로 표현하였던 것이 茶詩라 하겠다.

고산의 생애를 통해 가장 정신적 영향력을 끼친 이 茶詩는 뭐라해도 제1권에
기록된 '孤山遺稿'의 茶詩一首인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차계하운(復次季夏韻)

산중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빌려씀이 풍습이라니,
景休君 말에 처음 나는 의아하게 여겼음이.
사방엔 첩첩이 겹친 산봉우리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뒷면엔 십리나 되는 모래밭은 구불구불 물따라 감싸 있구나.
오두막 집 낮은 울은 공들여 세워 놓은것 같고,
거친 茶와 현미밥은 기다리지 않았어도 내 오누나.
끝내 기대함이 원하여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음은,
오랫동안 회상했던 芙俑洞(부용동)의 내 집 탓인것을.


*고산의 茶詩 특징분석

고산 윤선도는 다른 시조문학 학자보다 시가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론
할것 없이 그 연구와 평가가 활발하고 대단하였다. 또, 고산을 조선시대 제일 가는
시인이라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아니 하는 만큼 茶詩 문학자로서 인정받아야 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산의 문학연구를 살펴보아도 다도관을 연구하거나 평가한 바는
없었다. 또한 고산의 차생활과 정신을 이해하고자 내면적 사상과 문학적 특징을
비교 분석한 적도 없다. 그러나 이런 원인은 문학세계만을 이해하였지만 오랜
차생활에 잠재된 생활여유 부분을 심도 있는 이해의 부족이라 믿어진다.

고산의 총체적 문학관을 살펴보고 그 문학의 내적의미를 이해하는데는 茶人이
아니고서는 차의 五味를 모르듯이 고산 문학의 심충부에 묻어진 다도의 자연세계를
쉽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고산 문학성의 이해와 관찰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번 '孤山遺稿'에서 찾아낸 '復次季夏韻'이란
茶詩는 아마도 시대적으로 보아 중, 후기 작품이라 보여진다.

儒家의 사대부 집안 선비로서 교육과정을 맞았던 성장기와 벼슬길을 나섰던
출사기, 귀양살이의 고통, 은둔생활에 얻은 자연관, 현실에 적응하였던 삶을
체험하였던 세계가 곧 고산의 다도 문학을 발전 시켰다. 산중 사람들의 삶과 생활
환경의 풍속을 이해할 기회조차 없었던 고산은 보길도에 가서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벼슬없는 가난한 선비로서 농촌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사대부 가문의 벼슬길 욕망보다 자연과 살면서 자연의 내면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또 빈부의 차등을 구분없이 서로 마음을 열고 이웃간에 서로 도움을 나누며 오손도손
티 없이 맑게 살아가는 두레정신의 미덕에 인간이 가진 새로운 삶의 세계에 관심을
가져볼 수 있었다. 자연을 이해하고 살아온 경휴군이 농촌사람들의 생활을 쉽게
이해되어 상세히 설명하야 줌으로써 儒家의 선비인 고산이 살아온 삶과 산중사람들의
삶을 비교하여 자신의 자연관을 깨닫게 되었다.

보길도 주변 바닷가와 사방이 첩첩한 산봉우리가 쌓여있는 산의 경치가 너무 아름답고
바다의 모래밭은 해 따라 물길따라 굽이굽이 무늬지어 감싸여 있는 자연의 멋과
자연배경에 푹 싸여 보게되니 그동안 쌓였던 사대부의 모든 욕심을 스스로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오두막집에 낮은 울타리라 할지라도 하나하나마다 정성이 들고 공손하게
세워 놓은 그 성의의 표현은 너무나 순수한 자연의 마음씨를 곧 문학적으로 표현시킬
아름다운 세계라 느끼게 하였다.

일상생활에 매일같이 먹는 아주 거친 차와 현미밥은 때가 되면 기다리던 아니 기다리
던간에 먹을 시기만 되면 먹을 수 이쓴 한끼 한끼라도 만족을 느끼게 되어야 하며
모든일에 턱없는 기대는 말아야 하였다. 은근히 기대한 것들이 마음먹은 대로
아니되는 것을 오랫동안 생각했던 부용동의 내집이 있어서 자신의 잘못이지 누구의
잘못이라고 지적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 세상일을 이해할 부분을 재인식하는
자아인식과 자연주의는 功利主義의 테두리 위에서 맴돌았음을 실증해 주었다.
이렇게 고산의 차생활이 박학다식한 문학, 詩歌는 고산의 생애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茶詩를 통해 고산의 자연섭리를 이해 할 뿐만 아니라 삶의 멋과 생활의 멋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산은 오래전부터 儒, 佛, 仙道 三道 사상이 깊이 이해되어져
문학속에 혼합되어 이뤄졌으나 그 형성시기, 수용시기는 제각기 다르고 발전과정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유교적인 사상에 해당된 고산은 문학적 세계도
유교철학이 주종을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어수선한 시대적 배경과 사대부의
종가에서 외로운 소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먼저 小學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아
실력배양과 인격 형성에 교본으로 삼았으며 차생활을 통하여 자연관의 이해가
문학 발전에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고 믿어진다.

한편, 그의 생애에 出仕 9년은 세번째 유배의 길이 있었고 귀양살이는 14년이
넘는다. 고향 해남을 왕래하거나 보길도에 은둔생활을 하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즐길 수 있었던 고산은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을 벗삼는 사상을
가르쳐 주었다. 고산은 자신의 교육이념을 제자와 문인들에게 소학을 교과서로
삼아 가르치는데 힘썼으며 평상심을 문학성으로 표현시켰다. 오랜 차생활을 통해
얻어진 고산의 다도관 이해가 茶詩문학의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고산 윤선도는 1587(선조 20년)에서 1671년(현종 12년)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유교사상 중심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고산의 문학세계되 유교철학이 주사상을
이루고 있었음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한 작가의 의식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아니한다. 그 시대에 공존한 인물이라
할 지라도 여타사상에 감염되거나 생활 환경의 영향이 미치고 우리 고유의 풍속과
민간신앙에 어느 방향이던 확리적 실증에 반영하여져 의식세계가 돌출될 수 있다.
고산은 광해군 8년 예조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결과 그들의
세력에 되몰리어 함경도 경원땅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지은 다음 작품에서
유교적인 핵심과 충효의식을 주제로 한 작품이 그 뒷받침을 해준다.


애국 위해 몸 가벼워 하기는 쉬우나
어버이 생각때문에 그 눈물 참기 어렵네


고산은 애국충정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가벼이 하기 위해 상소문을 올리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신변을 걱정하고 아버지 생각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는 비애를
노래한 이 시는 유교사상에 심취하여 내세우는 출사기를 통한 고산문학을 이해 할 수
있는 반면 보길도의 은둔생활을 통하여 사대부 생활에서 체험하지 아니하였던 생활의
변화가 고정된 작가의 의식세계를 새로운 가치관으로 유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고산이 유교시대에 살았다고 하지만 한시, 金鎖洞記, 醉仙樓賦등의 내용을 보면
의식적으로 불교세계를 동경한 솔직한 마음의 표현을 쉽게 볼 수 있고 茶禪一味의
자연관에 통달되어 있었다. 또한 佛敎철학을 이해한 학문도 어느 정도 경지에 있었다.
따라서 불교적 용어와 그 내용이 산재한 詩語에서 불교사상에 심취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정심암

연화봉 아래 정심암의
단청은 번쩍 번쩍 불감을 비추네


백두산 남쪽의 삼강 고을에 자리하고 있고 정심암의 노래에 사찰 소재를 호의적
방식과 표현으로 가장 불교적 반응을 보였다. 또 고산이 살았던 蓮洞이라는 洞名은
불교의 상징인 연꽃의 묘사이다. 연과 불교의 관계를 이해함에 앞서 먼저 다도의
세계에 묻어진 정숙한 禪의 세계입문은 고산의 다도문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
로 믿어진다. 그러므로 고산의 문학에는 詩, 歌, 樂, 茶가 총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인정되지만 사실 다도는 고산 윤선도가 사대부적 문학을 탈피하고 자연 조화를
재인식하는 자연세계의 다도관을 이해하는 계기도 되었다. 사색과 멋스러움의 삶,
인간의 가치관을 사대부 가문에서 이해하기보다 다도생활을 통하여 얻은
敬寂樂養和(경적악양화)의 사상적 배경으로 이루어진
和靜的 문학은 고산의 새로운 다도 문학세계를 만들게 되었다.


결론.

고산 윤선도 茶詩考에서 논의한 고산의 문학, 고산의 茶詩에 관한 결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산은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극심한 시대에 살면서 우국충절의 신념을
다해 온 충직한 성품의 선비로서 분당과 당쟁의 갈등에 휘말려 그의 생애동안 출사,
유배, 은둔생활이 반복되는 동안 詩, 禮, 樂, 茶의 세계에 통달하여 인격을 완성
시킨 인물이다.

2. 고산의 문학을 살펴보면 현실 참여 기회가 박탈된 유배지에서 지은 작품 '遺懷謠'
등이 전기문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은둔생활 동안 현실 참여를 위해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던 중기와 후기 문학 가운데에는 자신의 고향 해남에서 지은 '산중신곡',
금강동에서 지은 '산중속신곡'과 보길도에서 지은 '어부사시요'가 있다.
한편, 후기 문학인 '몽천요'는 경기 양주땅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곤경에 처하게
된 동기유발에 관한 내용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3. 孤山遺稿는 1798년 3월에 전라감사 서정수에 의해 발간된 고산의 가첩으로서
시조가 총 75수나 기록되어 있는데 고산문학을 평가 분석한 논문, 저서 등은
140여 편이 있으나 고산의 차생활과 차문학에 대해 고찰을 한 논전은 한 편도 없다.
孤山遺稿 제 1권 시문 60쪽에 '복차계하운'이란 다시 한수가 발견되어 고산의
다시 문학세계를 조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4. 茶詩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대부 집에서의 성장기와 출사, 유배 및 은둔의 일생을
통하여 출사기까지는 산중 사람의 자연관과 생활 풍속을 이해할 기회가 적었으나
은둔기 동안 자연에 순응하며 불편없이 생활하는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거친차와
현미밥으로 가난히 생활 할 지라도 만족 할수 있었던 것은 부용동에서 느낀 자연관
때문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산의 문학은 격조 높은 문학적 가치를 평가받는 만큼 고산의 茶詩
문학에 대해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천랸 다향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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